손혁 전 키움 감독. /OSEN

[한스경제=이정인 기자] 프로야구 서울 히어로즈에는 ‘파격적인 구단’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탄생 과정부터 남달랐다. 지난 2008년 현대그룹이 야구단을 포기하자 이장석 전 대표가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을 기반으로 히어로즈를 창단했다. 모기업이 없는 히어로즈는 ‘네이밍 스폰서(후원기업에 사업비를 받고 구단 이름에 메인스폰서 기업명을 넣는 계약)’라는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국내 프로스포츠 구단 중 최초로 도입했다. 모그룹의 지원 없이 순수하게 입장권, 광고, 상품 판매 등으로 구단을 운영해 ‘자생력 있는 구단’으로 평가받았다.
 
히어로즈는 감독 선임에 있어서도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지난 2013년 염경엽(52ㆍ현 SK 와이번스 감독)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길 때부터 파격의 길을 걸었다. 당시 히어로즈는 다른 팀들이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나 이름값 있는 스타플레이어 출신을 선임한 것과 정반대로 현장 경험은 적고, 프런트 경력이 많은 무명 선수 출신의 염 감독을 수장 자리에 앉혔다. 히어로즈는 염 감독 부임을 기점으로 가을야구 단골 팀이 됐다. 2013년 첫 포스트시즌(PS) 진출을 시작으로 2016년까지 4년 연속 가을 무대를 밟았다. 하지만 염 감독은 2016년 준플레이오프에서 패한 뒤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염 감독이 팀을 떠난 뒤엔 현장 지도자 경험이 아예 없는 장정석(47ㆍ현 KBSN 스포츠 해설위원) 감독을 선임해 야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장 감독은 부임 후 첫 시즌이었던 2017년 7위로 부진했지만, 2018년에는 4위로 다시 포스트시즌에 올랐다. 2019시즌에도 정규리그 3위로 가을야구에 진출해 5년 만에 한국시리즈 무대에 올랐다. 준우승에 그쳤으나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즌 종료 후 무난한 재계약이 예상됐다. 그러나 히어로즈는 지난해 11월 뚜렷한 성과를 낸 장 감독과 재계약 하지 않고, 감독 경험이 없는 손혁(47) 당시 SK 투수코치를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인사를 단행했다.
 
초보인 손 감독은 부임 첫해 비교적 선전했다. 미숙한 경기 운용으로 팬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시즌 내내 상위권을 유지했다. 주축 선수들의 줄부상과 외국인 선수의 부진 속에서도 잘 버텼다. 올 시즌 지휘봉을 잡은 사령탑 4인 중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 중이었다.
 
그러나 손 감독은 8일 돌연 지휘봉을 내려놨다. 부임 첫 시즌을 완주하지 못하고 가을야구 코앞에서 물러났다. 키움은 7일 기준 73승 1무 58패로 리그 3위를 달렸다. 치열한 순위싸움 중에 포스트시즌 진출이 유력한 팀의 감독이 사퇴하는 것은 KBO리그 역사를 살펴봐도 좀처럼 찾기 힘든 일이다. 손 전 감독의 승률 0.557는 자진 사퇴한 감독 가운데 역대 승률 2위에 해당한다. 역대 1위는 2011년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으로 승률 0.559를 기록한 가운데 스스로 물러났다. 5할 이상 승률을 기록하면서 스스로 지휘봉을 내려놓은 감독은 둘뿐이다. 구단은 “손혁 감독이 최근 성적 부진에 대해 감독으로서 책임지고 사퇴 의사를 전달했다”고 발표했다. 김치현(43) 키움 단장은 "객관적인 수치와 다르게 감독님은 느끼신 것 같다. 기대치가 달랐다"고 해명했다.
 
구단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는 야구 관계자는 없다. 야구계에선 성적 부진 아닌 다른 배경이 있다는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키움 구단이 자진사퇴임에도 내년 연봉까지 모두 지급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경질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손 감독이 구단 고위층 인사의 과도한 간섭과 경기 개입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결국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난 것이라는 주장도 고개를 들었다. 한 야구인은 “자진 사퇴라는 말을 믿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손 감독이 구단 고위층으로부터 성적에 대한 압박을 받았다는 얘기가 많다”고 전했다.
 
구단이 윗선 개입은 없었다고 선을 그었지만, 의혹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히어로즈 구단 고위층의 잦은 간섭과 압박 의혹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팀의 전성기를 이끈 염경엽 감독은 선수단 운영에 과도하게 간섭한 이장석 전 대표와 갈등을 빚다 팀을 떠났다. 장정석 감독은 수뇌부의 헤게모니 싸움의 희생양이 됐다. 장 감독은 손혁 감독을 수석코치로 임명하라는 허민 의장의 제안을 거부한 이후 재계약이 불발됐다.
 
히어로즈는 비상식적인 행보로 또 한 번 야구계를 놀라게 했다. 구단은 손 전 감독의 자진 사퇴를 수락하고, 올해 나이 35살인 김창현 퀄리티컨트롤 코치를 감독 대행으로 선임하는 ‘기행’을 선보였다. 김 대행은 경희대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프로 경력은 없는 인물이다. 2013년 구단 전력분석원으로 입사한 8년 차 프런트다.
 

히어로즈의 홈 구장인 고척스카이돔. /OSEN

시즌 막판 순위싸움이 한창이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 가을야구도 지휘해야 한다. 그런 자리에 손 감독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며 팀을 이끌어온 홍원기(47) 수석코치 대신 지도자 경력이 전혀 없는 전력분석 담당 코치를 대행으로 선임한 건 야구계에서 상식적으로 통하지 않는 일이다. 프런트가 현장에 개입할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파격적인 행보의 결말은 매번 파국이었다. 히어로즈는 감독들의 무덤이 됐다. 잘 되는 팀은 현장과 프런트가 서로를 존중하고 능력을 인정한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히어로즈의 프런트 야구가 KBO리그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이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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