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지방단체장 취임식이 있던 1일, 다산 정약용(1762~1836) 생가를 다녀왔다. 가깝게 지내는 이들로부터 초청을 받았지만 취임식장 대신 남양주를 택했다. 다산 생가를 찾은 이유가 있다. 취임식장에 앉아 의례적으로 박수치는 대신 다산의 말씀과 정신을 살피기 위해서다.

6‧1 지방선거에서 선출된 단체장은 광역 시‧도지사 17명과 기초 시장‧군수 226명이다. 이들은 조선시대 지방 수령에 해당한다. 지방의원까지 포함해 4000여명에 달하는 지방 정치인이 새 출발했다. 자치단체장은 앞으로 4년 동안 지역 살림을 떠맡는다. 지금보다 나아지는 곳도 있겠지만 정체 또는 퇴보하는 지역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지방 정치는 풀뿌리 생활정치를 구현하는 마당이다. 단체장은 누구보다 지역민과 가까운 거리에서 호흡한다. 민주주의 작동 원리를 고려할 때 지방자치는 중요하다. 지방 자치단체장은 인사와 예산, 인‧허가권을 틀어쥐고 있다. 자치단체장이라는 위치는 결코 작지 않다. 인구 3만~4만명에 불과한 지역 군수도 우습게 여기면 안 된다. 그들은 해당 지역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주어진 권한을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따라 지역민의 삶과 질은 달라진다. 지방자치 역사는 짧지 않다. 지방의원을 선출한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31년째다. 지난 30여년 동안 지방자치는 비약적 성과를 냈다. 지역을 다니다보면 실핏줄처럼 뻗은 도로와 복지시설, 생활환경에 감탄하게 된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곤 때로 감동에 이른다. 한데 지역민들이 느끼는 체감정도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모든 부정적 지표에서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1위다. 자살률 18년째 1위, 산재 사망률 24년째 1위,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 압도적 1위, 청소년 자살률 1위, 출산율 세계 최저(4년 연속 합계 출산율 1명 미만), 불평등 정도 1위다.

물론 이 모든 책임을 지방정치에 물을 수 없다. 하지만 지방정치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주장에는 누구도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다. 중앙집권이라는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지방정치는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단체장이 행사하는 권한은 크고 영향은 직접적이다. 제대로 작동한다면 지역 공동체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또 지역갈등을 해소함으로써 발전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기대를 밑돈다. 고압적으로 민원인을 대하거나 비리에 연루돼 중도하차는 단체장도 적지 않다. 당장 인터넷 검색창에 ‘단체장 비리’를 입력하면 관련된 사건이 고구마 넝쿨처럼 나온다.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1995년 1기 지방단체장 선출 이후 70여명이 사법 처리됐다. 수도권과 지방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인구가 적은 지역에서 더 기승을 부린다. 인구 180만명에 불과한 전북은 지금까지 기초단체장 18명이 중도 하차했다. 또 3만명 안팎 임실군은 ‘군수의 무덤’으로 불린다. 초대 군수를 시작으로 연달아 4명이 구속됐다. 부정부패 척결을 앞세워 당선된 농민단체 출신 군수 또한 사법 처리를 피하지 못했다. 1~2년 꼴로 보궐선거를 치르느라 지역공동체는 파괴됐고, 지방 재정은 바닥났다.

고질화된 단체장 비리는 어디에 원인이 있을까.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은 2020년 ‘지방정치 부패구조 개혁방안’이란 의미 있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지방단체장과 지방의원 350명을 인터뷰했다. 결론은 “지방정치인은 구조적 부패에 노출돼 있다”였다. 부패 유발 원인을 물었는데 ‘선거 비용’을 꼽은 경우는 단체장 41%, 지방의원 75%였다. 또 ‘정당 공천’이라고 답한 비율은 단체장 73%, 지방의원 88%에 달했다. 부패 사슬고리가 어디에 있는지 가늠된다. 중앙정치에 예속된 탓이다. 정치개혁이 절실하지만 권한을 틀어쥔 국회는 밥그릇을 내려놓지 않는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도 여야 모두 공천 몸살을 앓았지만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

그러면 단체장들은 면죄부를 받은 것일까. 구조적 문제로만 떠넘긴다면 무책임하다. 장기적인 정치개혁은 과제로 남겨놓더라도 의지에 따라 변화를 도모할 여지는 많다. 3선에 성공한 정헌율 익산시장은 취임식 첫날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그는 페이스북에 “옆자리에 앉은 고등학생과 ‘100원 동행 버스’ ‘수능’ 이야기를 나눴다. 현장 목소리를 시정에 적극 반영하겠다”고 적었다. 역시 3선 이태훈 대구 달서구청장은 노인복지관에서 배식봉사로 첫 날을 보냈다. 조재구 남구청장, 류규하 중구청장, 류한국 서구청장도 급식봉사와 새벽 생활폐기물 수거, 저소득층 집수리 현장에서 취임식을 대신했다. 일부에서는 파격적이며 간소한 취임식이 화제가 됐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서로 협력해 도민을 섬긴다는 의미에서 ‘맞손 신고식’을 가졌다. 김두겸 울산시장은 지역사회에 선행을 베푼 시민 60여명과 조촐하게 취임했다. 박완수 경남도지사도 시민 50명과 간소하게 출발했다. 화려한 축하행사나 대규모 취임식이 사라진 건 시대 흐름을 반영한다. 관건은 4년 내내 같은 마음가짐을 유지하느냐다.

부패 사슬고리를 끊는 정치개혁과 함께 공복으로서 마음가짐을 생각한다. 더는 지방자치가 비리온상이 아닌 감동과 변화를 주도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지방 수령에게 필요한 덕목을 12장으로 정리했다. 1장 부임 육조(赴任六條)에는 첫 마음가짐을 담았다. ‘재물(행사비용)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 악습을 없애라. 함께 가는 사람을 많이 데리고 가지 말라. 아랫사람을 따뜻하고 예의 있게 대하라. 온화하고 간결하게 말하라. 법을 무겁게 지켜라. 조용히 명상하며 다스릴 방도를 세우라.’ 첫 출발하는 단체장들은 얼마나 부합했는지 견줘 볼 일이다. 경기도 남양주 마재 마을은 서울에서 40분 거리다. 그곳에서 다산이 남긴 말씀과 뜻을 새기고, 묵상이라도 잠긴다면 꽤 괜찮은 첫 출발이라고 생각된다.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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