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용두사미(龍頭蛇尾), 반쪽, 졸속.” 23일 국회를 통과한 ‘K 칩스법’을 바라보는 반도체업계 시각이다. 법안 내용을 들여다보면 불평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일반인 눈에도 심각한 위기가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K 칩스법’이 시행되면 국내 반도체 산업은 경쟁력을 잃는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경쟁자는 쿠션 좋은 나이키 에어를 신고 성큼성큼 내닫는데 우리 기업은 딱딱한 운동화를 신고 숨차게 따라가는 형국이다. 내년 세계경제는 ‘R의 공포(경기침체)’까지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K 칩스법’을 졸속처리한 국회를 탓하지 않을 수 없다.

‘K 칩스법’은 반도체 설비에 투자할 경우 세금을 깎아주는 것이다. 국회를 통과한 대기업 세액 공제율은 기존 6%에서 8%로 찔끔 높였다. 애초 여당과 야당은 각각 20%와 10%로 제안했다. 결과는 여당 안은 물론이고 야당 안에도 크게 후퇴했다. 반기업적 입장을 고수한 민주당과 무기력한 국민의힘, 그리고 소극적인 정부 합작품이다. 국민의힘은 4개월 전만 해도 반도체 산업 육성에 적극적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당시 “반도체 산업은 생사가 달린 문제”라며 적극적인 지원을 강조했다. 국민의힘은 당내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무소속 양향자 의원을 위원장으로 영입하며 후속 대응에 나섰다.

특위를 결과를 토대로 양 의원은 대기업 20%, 중견기업 25%, 중소기업 30%를 내용으로 하는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국내 반도체 산업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반도체 패권 전쟁’ 중인 세계 흐름을 감안할 때 과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미국은 반도체 기업에 대해 향후 5년간 보조금 390억 달러(약 51조원)를 지원하고, 자국에 시설 투자할 경우 25% 세금을 공제해준다. 대만 역시 반도체 연구개발 및 설비투자 세액공제 비율을 15%에서 25%로 올리는 법안을 발의했다. EU는 반도체 생산 확대를 위해 430억 유로(58조7700억 원) 규모 펀드를 조성하기로 합의하고, 일본은 대만 TSMC 유치를 위해 절반에 해당하는 투자비용 4,760억 엔을 지원했다.

주요 반도체 국가들이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고 세금을 깎아주는 건 다름 아니다. 반도체 산업에서 경쟁력을 잃으면 주도권을 상실한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IT정보화 시대, 반도체는 ‘절대 반지’나 다름없다. 가전제품부터 자동차와 비행기, 첨단 군사장비까지 반도체는 핵심 부품이다. 반도체 없는 IT정보화와 4차 산업사회는 상상할 수 없다. 주요 선진국들이 앞 다퉈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는 이유는 ‘절대 반지’가 갖는 위력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국회는 세계적인 흐름에 눈 감았다. 이러고도 민생을 외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법안이 통과되자 ‘K 칩스법’을 주도해온 양향자 의원은 격하게 비난했다. 그는 “반도체 투자 세액공제 글로벌 스탠더드는 25%이고, 중국은 무려 100%다. 미국에 공장을 지으면 25% 세액공제 혜택을 받고, 막대한 지원금까지 받는데 8%로 경쟁이 되겠느냐. 지금까지 한국에서 미국으로 빠져나간 투자금만 300조원이다. ‘코리아 엑소더스’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며 한탄했다. 반도체 산업계도 “촉각을 다투는 반도체 전쟁에서 정부가 세수 감소에만 매몰된 것 같아 안타깝다”는 입장을 내놨다.

민주당은 반도체 기업에 대한 지원을 특혜로 바라본다. 향후 세계 반도체 시장이 어떻게 재편되느냐에 따라 국가 경쟁력이 좌우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도외시한 단견이다. 민주당 주장대로 세금을 깎아준 만큼 당장 고용이 늘고 근로자 처우가 개선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선순환을 불러일으킬 건 불문가지다. 기업 입장에서 자금 여력이 있다면 시설투자나 고용창출, 고용여건을 개선하는데 사용하게 된다. 효과를 체감하는 시점이 언제냐가 관건이다. 경제 상황이 호전되면 투자 시기는 앞당겨진다. 그러나 법인세 최고세율 1% 인하에 이어 투자 세액공제율마저 대폭 후퇴함으로써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조선시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벼슬길에 오르기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오랜 장마로 끼니가 끊기자 계집종이 옆집 호박을 훔쳐 죽을 끓여 올렸다. 아내가 나무라는 이유를 알게 된 다산은 “만 권 책을 읽은들 아내가 배부르랴, 두 이랑 밭만 있어도 계집종이 죄짓지 않아도 될 것”이라며 자기 책임으로 돌렸다. 지금 우리 국회 상황은 어떤가. 경영난 때문에 문 닫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는 늘고 먹고사는 게 힘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실이다. 다산은 윤리를 앞세워 어린 계집종을 꾸짖고 매질하는 대신 무능한 위정자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국회는 8월 ‘K 칩스법’ 발의 이후 제대로 된 논의를 하지 않았다. 또 민주당은 국민의힘 반도체특위원장을 맡은 양 의원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K 칩스법’을 부정적으로 대했다. 정쟁에 휩쓸린 나머지 ‘뭣이 중한지’를 망각한 ‘좁쌀 정치’ 때문에 국민 삶이 망가지고 있다.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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