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이슬람과 로마 기술의 진수 아글라비드 저수지
이슬람 모스크 양식의 토대를 제공한 카이루안 대모스크
3만5000석 거대 규모 자랑하는 엘젬 원형경기장
카이루안 대모스크 안뜰 전경 / 튀니지=이수현 기자
카이루안 대모스크 안뜰 전경 / 튀니지=이수현 기자

[튀니지=한스경제 이수현 기자] 수도 튀니스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한다. 지중해 기후에 푸른 내음이 가득했던 북부와 달리 튀니지 중부는 황톳빛 세상이 펼쳐진다. 길가에는 낙타와 양이 주인을 따라 움직이고 야자수 대신 선인장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튀니지 중부와 북부의 차이는 자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 카르타고 지역을 중심지로 삼았던 로마와 동로마 제국에게 튀니지 중부는 아프리카 끝자락이자 변방일 뿐이었다. 반면 아라비아반도에서 등장한 이슬람권은 지금의 이집트와 리비아를 거쳐 튀니지 중부에 거점을 마련했다.

엘젬과 카이루안, 모나스티르 등 여러 도시는 로마와 이슬람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탄생했다.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면 로마의 찬란한 유산이 보이고 다른 한편에는 웅장한이슬람 건축물이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두 문명이 조화를 이루니 볼거리 또한 넘쳐난다.

카이루안 건물 벽을 채운 아라베스크 무늬 / 튀니지=이수현 기자

튀니스에서 다른 도시로 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버스는 운행 횟수가 적어 불편하고 기차는 적은 횟수와 함께 속도가 느리다. 그렇다고 차를 빌리는 것도 쉽지 않다. 국가비상사태가 발효 중인 튀니지는 도로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했다. 언어가 서툰 이방인들에게 이러한 검문은 매우 까다롭다.

이에 튀니지인들은 '루아지'라는 독특한 교통수단을 발달시켰다. 승합차를 활용해 도시를 연결하는 루아지는 8명이 모여야 출발하기 때문에 정확한 출발 시간을 아무도 모른다. 튀니스 같은 대도시라면 금방 사람이 모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몇 시간이고 인내해야 한다. 하지만 루아지는 불편함 감수할 정도로 빠르고 편하다. 기차보다 빠르고 버스보다 자주 운행하기 때문에 가이드 없이 혼자 여행하는 이들에게 루아지는 최고의 교통수단 중 하나다.

규모가 있는 도시라면 하나쯤 있는 루아지 정거장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 마치 시장을 연상케 한다. 운전기사들은 자신들의 목적지를 외치면서 탑승객을 모으고 루아지 하차장에는 손님을 태우려는 택시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루아지는 낯설 수 있지만 한번 적응하면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아글라비드 저수지 / 튀니지=이수현 기자
아글라비드 저수지 / 튀니지=이수현 기자

수도 튀니스에서 차로 약 2시간 30분을 운전하면 중부 대표도시 카이루안에 닿는다. 670년 이슬람 정복자들이 세운 카이루안은 튀니지 고원에 자리했다. 이슬람이 튀니지를 넘어 모로코와 스페인까지 확장하는 동안 카이루안은 북아프리카의 거점 도시로 크게 번성했고 12세기 수도가 튀니스로 옮겨진 후에도 튀니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도시로 인정받고 있다.

도심에 자리한 관광사무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한다.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웅장한 이슬람 건축물이 곳곳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가장 먼저 카이루안의 생명줄을 먼저 구경하기로 했다.

해안가와 수백km 떨어진 내륙 한가운데 자리한 카이루안은 주변에서 강도, 호수도 찾아볼 수 없다. 이에 카이루안 지도자들은 생존을 위해 거대한 저수지가 필요했고 860년경 당시 튀니지를 지배하던 왕조의 이름을 딴 아글라비드 저수지를 건설했다.

아글라비드 저수지 / 튀니지=이수현 기자
아글라비드 저수지 / 튀니지=이수현 기자

두 개의 거대 저수지는 관광사무소 옥상에 올라가면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관광사무소를 중심으로 양옆에 펼쳐진 저수지는 멀리서 보더라도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황량한 주변환경과 대비되는 푸른 물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보이고 거대한 규모는 당시 카이루안이 얼마나 번영했는지 보여준다.

저수지의 물은 카이루안에서 약 36km 떨어진 샘물에서 끌어온다. 당시 아글라비드 왕조는 지역에 남아있던 로마의 관계시설에 자신들의 기술력을 더해 수로를 완성했다고한다. 각 시대 최고의 기술력이 동원된 덕분에 1200년 이상 지난 지금도 완벽한 형태를 자랑한다.

카이루안 대모스크 외벽 / 튀니지=이수현 기자
카이루안 대모스크 외벽 / 튀니지=이수현 기자

저수지를 지나 카이루안 대모스크로 향한다. 이슬람 건축의 걸작 카이루안 대모스크는 그 자체로 여행의 목적이 될 정도로 웅장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지 단 38년 만인 670년 지어진 모스크는 초기 이슬람 건축 양식의 기준이 됐고 당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카이루안 대모스크 안뜰 / 튀니지=이수현 기자
카이루안 대모스크 안뜰 / 튀니지=이수현 기자

모스크에 다가가니 황토색 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성벽처럼 높게 솟은 벽은 이곳이 모스크가 아닌 하나의 성처럼 보이게 한다. 거대한 아치형 정문을 지나면 모스크의 안뜰이 보인다. 거대한 사다리꼴 모양인 안뜰은 사면이 아치형 기둥으로 둘러싸여 강한 햇빛을 피하도록 설계됐다.

카이루안 대모스크 대리석 기둥에 조각된 십자가 / 튀니지=이수현 기자 
카이루안 대모스크 대리석 기둥에 조각된 십자가 / 튀니지=이수현 기자 

각 기둥을 자세히 보면 한 가지 신기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기둥은 각자 개성이 넘친다. 색깔도 다르고 기둥에 그려진 문양도 제각각이다. 그 이유는 모스크 건설에 로마 시대 대리석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로마 유적지의 대리석 기둥은 도시 를 건설하면서 훌륭한 재료로 사용됐고 지금도 도시 곳곳에서 로마 문자와 십자가 등 로마의 흔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카이루안 대모스크 기도실 전경 / 튀니지=이수현 기자
카이루안 대모스크 기도실 전경 / 튀니지=이수현 기자

안뜰에서 로마의 흔적을 느낀 후 기도실을 둘러본다. 안뜰과 마찬가지로 로마 시대 대리석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도실은 웅장한 크기를 자랑한다. 무슬림들은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린다. 따라서 기도실의 크기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도시에 거주했는지 보여준다. 카펫이 깔린 바닥에 앉아 기도하는 무슬림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마음이 경건해진다.

엘젬 원형경기장 외관 / 튀니지=이수현 기자
엘젬 원형경기장 외관 / 튀니지=이수현 기자

카이루안을 떠나 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엘젬으로 이동했다. 티스드루스(Thysdrus)라고도 불렸던 엘젬은 카르타고와 로마를 거쳐 크게 번성했다. 올리브가 많이 생산된 엘젬은 로마인들의 인기를 끌었고 많은 이들이 이주해 대도시로 성장했다.

인구가 증가하는 만큼 이들을 만족시킬 시설이 세워졌다. 그리고 엘젬에는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원형경기장이 거주민들에게 유흥거리를 제공했다. 238년경 지어진 시설은 아프리카의 사나운 야생동물을 유흥거리로 사용하면서 로마 전역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약 3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시설은 엘젬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보여준다.

엘젬 원형경기장 전경 / 튀니지=이수현 기자
엘젬 원형경기장 전경 / 튀니지=이수현 기자

엘젬 원형경기장은 2000년 개봉한 영화 '글래디에이터' 촬영지로 사용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배우 호아킨 피닉스와 러셀 크로우의 열연으로 지금도 회자되는 영화에서 원형경기장은 주 무대 중 하나로 등장했다. 그 덕에 지금도 원형경기장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엘젬 원형경기장 지하 / 튀니지=이수현 기자
엘젬 원형경기장 지하 / 튀니지=이수현 기자

경기장 투어는 동물과 검투사를 가두던 지하에서 출발해 차례로 오르도록 설계됐다. 경기장을 오르는 동안 경기장 중앙으로 나와 야생동물과 싸우던 검투사의 입장이 될 수 있고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관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위로 올라가면 보이는 도시와 경기장 전경은 놓치기 아쉽다.

경기장을 오르는 동안, 여러 역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경기장 중앙은 야생동물이 관중들에게 달려들지 못하도록 벽을 미끄러운 대리석으로 제작했고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치르던 중 무너진 외벽 한쪽은 치열했던 그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생긴 총알 자국과 병사들의 낙서 등 경기장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면서 남아있는 흔적을 보고 있으면 경기장의 오랜 역사가 실감난다.

이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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