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한국과 일본 정상이 만난다. 대통령실은 다음 주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제77차 유엔총회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정상 회담을 갖는다고 발표했다. 한일 양국 정상이 얼굴을 맞대는 건 2019년 12월 중국 청두(成都)에서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간 만남 이후 33개월 만이다. 그동안 한일 양국은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얼굴 붉히며 대치해왔다. 한일 정상회담은 관계 정상화와 함께 양국 사이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3년여 동안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필요로 함에도 양국관계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며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다.

새 정부 출범 이후 한일관계 복원 필요성은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됐다. 양국 국민 인식 또한 궤를 같이하고 있다. 최근 동아시아연구원(EAI)과 일본 싱크탱크 겐론NPO가 발표한 ‘한일 국민 상호 인식조사’는 두 나라 사이 변화를 반영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인 응답자 가운데 ‘일본에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답한 비율은 30.6%로 집계됐다. 긍정 인상 비율은 2020년 12.3%에 불과했지만 2021년 20.5%에 이어 올해는 30%를 넘겼다. 일본인 역시 한국에 대한 긍정 평가는 2020년 25.9%에서 올해 30.4%로 늘었다. 특히 한국인 81%, 일본인 53%는 악화된 한일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물론 양국에 대한 부정 인상 비율(한국 52.8%, 일본 40.3%)이 여전히 높기는 하다. 그럼에도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이전 상태로 되돌릴 여지는 있다. 대통령실은 “일본과 양자회담은 일찌감치 합의했다. 일본과 서로 만나는 게 좋겠다고 흔쾌히 합의됐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여러 외교 경로를 통해 시도해온 물밑 노력이 구체화하는 모양새다. 정상회담 의제로는 강제징용 배상을 포함한 역사 갈등과 미래 협력 방안이 예상된다. 이번 정상회담은 유엔총회를 계기로 열리는데다 예정 시간도 30분여로 충분치는 않다. 그렇지만 벼랑 끝까지 치달았던 한일관계를 감안하면 만남만으로도 상징적 의미는 충분하다.

문재인 정부에서 한일관계는 최악이었다. 우리 정부의 위안부 합의 파기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전범기업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그리고 일본 수출보복조치와 지소미아 갈등이 뒤따르면서 양국은 서로를 적대시했다. 양국 정치인들 또한 반일과 혐한 분위기를 부채질하며 극한 대립으로 몰고 갔다. 때마침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은 설상가상이었다. 이 때문에 2018년 1000만명(한국에서 일본으로 700만명, 일본에서 한국으로 300만명) 시대를 열었던 양국 관광객은 월 평균 500명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또 양국이 감정적으로 비자 발급을 강화하면서 기업인과 유학생 불편도 가중됐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 외교적 해법과 우회로를 모색해 왔다. 우리 외교부는 최근 네 차례에 걸쳐 민관협의회를 개최함으로써 강제징용 문제 해결 의지를 드러냈다. 이제는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 노력에 화답할 차례다. 주지하다시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반도체와 대만 문제를 놓고 미중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여기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경제 상황마저 녹록치 않다. 고금리와 고유가, 고물가 그리고 원 달러 환율이 1400원대로 급등하면서 수입기업은 물론이고 수출기업까지 위협받는 상황이다.

한국과 일본은 흔히 말하는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다. 국익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에 생산적인 한일관계를 지속해야할 당위성은 넘쳐난다. 한데 문재인 정부는 과잉 민족주의에 기대어 한일관계를 정치적으로 악용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과 일본은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한데다 지리적으로 인접돼 서로 공조할 부분이 많다.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동맹과 ‘Chip4’는 대표적이다.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한일 양국은 상호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 이제라도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소모적 갈등을 끝내는 게 서로에게 이익이다.

한일 정상회담은 시간 제약 때문에 깊이 있는 논의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양국 정상이 만나는 것만으로도 관계 개선과 신뢰 회복이라는 긍정적 신호를 발신할 수 있다. 만남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오해는 좁히는 계기가 된다. 관계 개선에 나선 한국 정부 움직임에 맞춘 일본 정부 입장 변화도 기대된다. 일본은 민관협의회에서 집약된 의견을 이미 공유하고 있다. 긍정적이며 생산적인 관계 개선을 위해 일본 또한 과거사 인식을 포함 현안 해결에 보다 전향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기시다 총리는 “한일관계 개선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견해를 피력한바 있다.

한발씩 양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상회담이 선순환으로 이어지려면 감정적 대응과 정치적 꼼수를 내려놓고 유연해야 한다. 비온 뒤에 땅은 더 단단해진다고 했다.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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