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한국과 일본이 기분 좋은 축구 역사를 쓰고 있다. 한국은 3일 H조 3차전에서 포르투갈을 2대 1로 이겼다. 첫 골을 내준 뒤 동점골, 그리고 후반 추가 시간에 터진 역전 골이었다. 사실 승리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포르투갈은 FIFA랭킹 9위로 객관적 전력에서 우리를 앞선다. 또 호날두와 페페 등 월드 클래스 선수들이 포진해 있다. 한국은 전반 5분여 첫 골을 허용하면서 불안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막판 역전 골을 터트리며 12년 만에 16강 진출을 확정했다.

카타르 월드컵은 기존 틀을 허물고 있다. 그동안 줄리메 컵은 유럽과 남미가 독차지했다. 아시아는 오랜 동안 구색 맞추는 역할에 머물렀다. 그런데 잇따라 유럽과 남미 강팀을 격파하며 이변을 연출했다. 한국과 일본, 호주까지 아시아 3개국이 동시에 16강에 오른 건 사상 처음이다. 일본은 한국과 함께 파란을 일으켰다. 일본 또한 E조 3차전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2대 1 역전승을 거두었다. ‘무적함대’ 스페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승 후보였다. 일본은 1차전에서도 독일 ‘전차군단’을 멈춰 세웠다. 독일은 월드컵 4회 우승 국가다.

한국과 일본이 선전한 배경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은 세계 축구 평준화다. 일본 대표선수 26명 가운데 유럽 파는 19명이다. 이들은 유소년 시절부터 유럽과 브라질에 축구 유학을 다녀왔고, 또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면서 기량을 쌓았다. 한국 대표 팀에서 유럽 파는 8명이다. 일본보다 적지만 손흥민과 이강인, 황희찬은 기량 면에서 뛰어나다. 하지만 진짜 원인은 다른데 있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 신선한 자극을 주고받으며 선의의 경쟁을 통해 동반 상승을 견인해 왔다.

일본은 지난달 23일 독일에게 승리한 직후 한국에 대해 고맙다고 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한국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독일을 2대 0으로 격파했다.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결과였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 독일을 마주한 일본은 당시 한국과 독일 전을 떠올렸을 게 분명했다. “한국도 했는데 우리라고 못할 것 없다.” 일본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신감을 불어넣었고 할 수 있다는 결의를 다졌다. 결과는 2대 1로 ‘전차군단’을 격파하며 이변을 새로운 길을 열었다.

3일 한국이 포르투갈을 이기자 일본 누리꾼들은 열광했다. 일본 매체 ‘야후 재팬’은 한국 승리 소식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일본 팬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한국이 역전했다. 일본이 이긴 것처럼 기뻐” “한국이 역전해서 정말 기뻐” “더 이상 아시아를 무시하지 마라”라며 함께 축하했다. 만일 한국과 일본은 16강 고지를 넘는다면 8강에서 맞붙게 된다. 이강인은 이날 일본 대표 팀 쿠보 선수가 전한 응원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쿠보에게 일본 16강 진출을 축하했는데, 쿠보는 한국과 8강에서 만나자고 했다”고 들려줬다.

한국과 일본은 불행한 과거사를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두 나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를 피할 수 없다. 한 해에 1,000만 명(2018년)이 오가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밖에 없다. 일본은 한류에 열광하고, 또 일본을 찾는 한국 관광객은 급증하고 있다. 문제는 과거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는 양국 정치다. 이들은 정치적 목적에서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악습을 반복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친일몰이는 최고조를 이뤘다. 또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친일국방’ 운운하며 한일 갈등을 부채질했다. 1998년 10월, 김대중과 오부치는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선언했다. 그럼에도 양국 관계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양국 정치인들은 민족감정을 볼모로 혐한과 혐일 감정을 부채질해 왔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한국에 근무했다는 다카라다(寶田) 1등 서기관은 한국 국민들이 보여준 온정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구호 팀을 파견했고 위안부 할머니들도 원망을 내려놓고 성금을 전달했다. 이태원 참사를 맞아 이번에는 일본 국민들이 걱정과 애도를 표했다. 재난 앞에서 빛난 공감하고 연대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다. 1995년 1월 고베 대지진 당시 일본 시민들은 ‘FM요보세요’(‘여보세요’에서 딴 명칭)라는 라디오 방송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송출했다. 지진 피해를 입은 자이니치(재일 한국인)에게 재해 정보를 제공하고, 이들 또한 피해자임을 알릴 목적이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수많은 조선인이 희생된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김경화 넥스트미디어 리터러시 연구소장은 <같은 일본 다른 일본>에서 “지진으로 촉발된 불안감이 또 다시 자이니치에 대한 해코지로 번져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과 결연한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며 의미를 설명했다.

두 사례에서 봤듯 한일은 얼마든지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한국과 일본 16강 진출은 미래 지향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좋은 기회다. 책임 있는 정치라면 새로운 관계를 열 책무가 있다. 증오와 적개심을 불쏘시개 삼아 연명하는 정치는 구태하다.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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