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희망이란 길과 같아서 본래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은 때마다 가슴 한쪽에서 희망이 솟는다. 나아가 우리가 몸담은 공동체를 돌아보게 된다. 많은 이들이 같은 방향으로 뜻과 마음을 모으면 현실이 된다. 또 모든 역사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한길을 걸었던 많은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루쉰(魯迅 1881~1936)은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가다. 그가 단편 <고향>에서 정의한 희망은 가슴을 뜨겁게 한다. 루쉰이 말했듯 희망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희망이 있다고 믿는 이들에겐 희망이 있다. 간절히 갈망하면 희망은 이루어진다. 2023년 1월도 중반을 넘겼다. 많은 이들은 희망을 떠올리며 간절함으로 첫발을 뗐다. 하지만 희망은 매번 이루어지지 않는다. 돌아보면 기쁨보다는 좌절과 회한이 더 많다.

코로나19로 지난 3년여 동안 우리 삶은 황폐해졌다. 지금도 완전한 일상으로 회복은 더디다. 코로나19는 변이와 진화를 거듭하며 일상을 방해하고 있다. 여기에 이상기후까지 겹쳤다. 지난해 서울은 80년 만에 찾아온 폭우로 물바다가 됐다. 유럽과 미국 캘리포니아는 폭염과 산불로 불탔다. 유럽 기온은 관측 사상 두 번째로 높았다. EU 집행위원회는 가뭄으로 유럽은 매년 12조 원 규모 피해를 입는다고 발표했다. 온난화가 계속될 경우 2100년 유럽은 연간 손실액이 지금보다 4배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의 역습은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 호남은 올 겨울 폭설로 고립됐고, 1월 제주 한라산에는 300mm가 넘는 폭우가 내렸다. 유럽 또한 1월 평균 기온이 15~25도를 웃돈다. 겨울 같지 않은 겨울로 대부분 스키장은 폐장했다.

인류는 그동안 자연을 함부로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총체적 재난 앞에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새해를 맞아 루쉰의 ‘희망’을 떠올린 건 이 때문이다. 루쉰은 절망과 패배주의가 안개처럼 자욱한 중국사회를 질타하며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는 각성을 촉구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 것을 당부했다. 중국 상하이에 갈 때마다 루쉰 공원에 들린다. 우리에게는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진 홍커우 공원으로 익숙하다. 루쉰 공원을 찾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말했던 지성인의 육성을 듣기 위해서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1956년 루쉰의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고 기념관을 건립했다. 중국 인민이 가장 좋아하는 루쉰을 이곳으로 옮긴 건 탁월한 결정이었다. 지금은 공원주변을 고층 빌딩이 둘러싸고 있지만 1900년대 초, 상하이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각축장이었다. 동방명주(東方明珠)가 보이는 ‘와이탄(外灘)’에는 당시 조계지 흔적이 남아 있다. 조계지 입구에는 ‘중국인과 개는 출입 금지’라는 푯말이 걸렸다. 그 시절 중국인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00년대 상하이는 지독한 패배주의와 무력감이 지배했다. 아편과 마약장이가 넘쳐났다. 자포자기에 가까운 전염병만 자욱했다. 상하이 역사박물관에 가면 당시 무력감을 재현한 전시물을 볼 수 있다. 루쉰은 절망과 무기력이 극에 달했던 그때 역설적으로 각성을 촉구했다.

루쉰은 산문집 <조화석습朝花夕拾>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했다. ‘조화석습’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로 해석된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조급해하기 보다 여유 있게 대처하라는 중국인 특유의 철학을 담고 있다. 아침에 떨어진 꽃을 바로 쓸어내지 않고 해가 진 뒤에야 치우는 여유는, 어려울 때일수록 빛나는 가치다.

올해 한국경제는 어느 때보다 어렵다. 물론 경제가 어렵지 않은 때는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 금리 인상, 중국 수출장벽 여파로 올해는 유독 험난할 것으로 전망된다. 저성장과 고물가, 고금리, 고유가, 저환율로 기업과 가계 모두 안개 속에 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처럼 각박해지기 쉬운 때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느긋한 자세가 필요한 때다.

영국 화가 조지 프레데릭 왓츠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 의지를 여러 작품으로 남겼다. <희망, 1886년>은 대표적이다. 그림에는 한 여인이 지구본에 앉아 수금(하프 일종)을 타고 있다. 앞은 볼 수 없고 하늘은 어둡고 수금은 한 줄만 남았다. 모든 게 위태롭고 암담하다. 그런데도 화가는 제목을 ‘희망(Hope)’이라고 붙였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내 버리지 말아야할 가치가 있다면 희망임을 넌지시 알리고 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희망은 잠자고 있지 않은 인간의 꿈이다. 꿈이 있는 한 이 세상은 도전해 볼만하다. 꿈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에겐 선물로 주어진다.”고 했다.

거칠고 어려운 시대, 꿈을 잃지 말라고 한다면 현실감 없을까. 그래도 희망을 떠올리고, 시작해야 하는 건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