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저축은행 오지영. /KOVO 제공
페퍼저축은행 오지영. /KOVO 제공

[한스경제=이정인 기자] “친정팀에 비수를 꽂았다.”

팀을 옮긴 선수가 전 소속팀과 경기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펼쳤을 때 언론이 주로 쓰는 표현이다. 이적생의 활약 여부는 팬들의 눈길을 끄는 흥미 요소다. 특히 ‘어제의 동료’에서 ‘오늘의 적’이 된 이적생과 친정팀의 맞대결은 숱한 이야깃거리를 낳는다.

여자배구 페퍼저축은행 주전 리베로 오지영(35)은 23일 홈 경기에서 이적 후 처음으로 친정 GS칼텍스를 마주했다. 그러나 그는 이날 코트 밖에서 경기를 지켜봐야 했다. 트레이드 당시 원소속팀 GS칼텍스전에 투입하지 않기로 한 양 팀 합의 때문이다.

페퍼저축은행 오지영(가운데)이 웜업존에서 동료들을 응원하고 있다. /KOVO 제공
페퍼저축은행 오지영(가운데)이 웜업존에서 동료들을 응원하고 있다. /KOVO 제공

페퍼저축은행은 개막 16연패에 빠진 지난해 12월 26일 GS칼텍스를 상대로 2024-2025시즌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과 국가대표 출신 리베로 오지영을 맞바꾸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전력 보강이 절실했던 약팀 페퍼저축은행은 오지영의 GS칼텍스전 출전 불가 조항까지 받아들이면서 계약서에 사인했다. 공개되지 않았던 두 팀의 ‘밀약’은 트레이드 후 첫 맞대결이 열린 이날 알려졌다. 오지영은 세트스코어 3-1로 이기며 팀이 13연패에서 탈출, 시즌 2승째(21패)를 수확한 이날 경기를 비롯해 올 시즌 남은 2차례 GS칼텍스과 맞대결에도 나서지 못한다.

오지영 출전 금지 조항은 논란의 소지가 다분하다. 두 팀이 스포츠 본연의 가치인 공정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러한 트레이드 조항이 리그 풍토로 자리잡는다면, 순수한 경쟁은 불가능해진다.

오지영의 동의 없이 출전 금지 족쇄를 채운 것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선수가 구단의 사적 계약에 따라 부당하게 3경기 출전 기회를 박탈당한 꼴이기 때문이다. 자유계약선수(FA) 자격 취득, 개인 기록 타이틀 경쟁 등 선수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도 침해당한 게 된다. 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수의 경기 출전 기회를 박탈하는 건 어느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해야 한다는 스포츠 정신에도 위배된다.

선수 이동이 활발한 축구계에서도 과거 출전 금지 조항으로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2014년 4월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4강전을 앞두고 당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소속이던 티보 쿠르투아(31ㆍ현 레알 마드리드)가 친정팀 첼시FC와 경기에 출전하는 문제를 놓고 두 팀 간 신경전이 벌어졌다. 당시 유럽축구연맹은 옛 소속 클럽을 상대로 뛰지 못하도록 하는 계약은 무효라는 유권 해석을 내렸다. 연맹은 "스포츠 순수성 유지는 우리의 근본 원칙이다. 선수의 소속 구단이 아닌 다른 어떤 구단도 출전에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전했다. 국제축구연맹(FIFA) 역시 양 구단간 합의를 이유로 한 임대 선수 불출전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2020년 국제 추세에 맞춰 상무 선수들이 원소속 구단을 상대로 경기에 나설 수 없다는 규정을 삭제했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특정 선수의 특정 경기 출전 불가 조항을 삽입하는 것을 따로 금지하고 있지 않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만큼 출전 금지 조항 관련 논의에 착수할 방침이다. KOVO 관계자는 24일 본지와 통화에서 “오지영 사례를 보면서 연맹 내부적으로 선수 기본권 침해 등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구단들과 의논해 관련 규정 신설을 검토하는 등 개선 방향을 모색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이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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