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이란과 관계가 또다시 악화할 조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 적은 이란, 한국의 적은 북한”이라고 언급한 발언 때문이다. 대통령실은 “이란 측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외교부는 “아크부대 장병들에게 열심히 근무하라는 취지였다. 해당 발언은 한국과 이란 관계와는 무관하다”고 해명했지만 불길은 계속타고 있다. 대통령실은 “오해가 풀리면 정상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세르 칸아니 외무부 대변인은 23일 “테헤란과 서울에서 진지한 우리 입장을 전달했다. 한국 정부는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보였다”면서도 “조치는 충분하지 않았다”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해외 순방 때마다 윤 대통령 설화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유엔총회 순방 때는 “바이든 날리면”이라는 비속어 논란을 자초했다. 외교부는 왜곡 보도라며 최초 보도한 MBC를 상대로 정정 보도 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 때문에 외교성과가 가려진 건 사실이다. 한데 이번에는 이란을 적대국가로 간주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또 다른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해 1월에도 우리 정부는 이란 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이란 정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요구를 받아들여 호르무즈 해협에 우리 군을 파병했다. 당시 트럼프 정부는 이란과 핵합의 파기에 이어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살해함으로써 긴장이 고조되던 때였다. 문재인 정부는 파병을 강행했고 이 때문에 이란과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정세균 총리는 특사자격으로 이란을 방문해 어렵게 불을 끄고 돌아왔다. 겨우 봉합했던 이란과 관계는 윤 대통령 발언으로 다시 균열이 가고 있다.

당장 이란 정부는 동결 자금(70억 달러‧한화8조6,800억 원) 반환을 촉구했다. 이 돈은 우리가 이란으로부터 원유를 구입한 대금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에 동참해 대금 지불을 중지한 상태다. 이란 입장에서는 황당한 결정이다. 물건을 가져가고도 돈은 주지 않으니 발끈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은 적”이라는 발언까지 나왔다. 미국과 이란 간 갈등이 고조되던 2013년에도 한국은 미국 편에서 이란 정부를 자극했다. 당시 라히미 이란 부통령은 “한국은 미국을 따라 (이란)제재에 가세하면서도 이란에 물건을 팔고 있다. 관세를 200% 올리고, 한국 상품을 사지 못하도록 하겠다.”며 격하게 반응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이 있다. 미국과 이란이 충돌할 때마다 우리 정부 신세가 그렇다. 미국 압력에 굴복하는 모양새가 반복되면서 이란을 자극하고 있다. 한국은 이란과 경제적으로 밀접해 자칫하면 국익에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다. 사실 한국과 이란은 오랜 친구다. 1977년 수교와 함께 서울 강남에 ‘테헤란로’가 들어섰다. 거꾸로 이란 테헤란에는 ‘서울로’가 있다. 두 나라는 46년 넘게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또 이란에서 한류 바람은 거세다. 중동에서 한국산 가전제품과 자동차 점유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이란이다.

10여 년 전 테헤란을 방문했을 때 한류를 체감했다. 당시 한국 드라마 대장금 시청률은 무려 90%를 기록했다. 현지에서 만난 언론인은 나머지 10%는 TV수상기가 없는 가정이라고 했다. 사실상 100% 가까운 열풍이다. 또 삼성 파브TV와 LG 양문형 냉장고, LG에어콘 점유율도 50% 이상 웃돌았다. 운행하는 자동차 2대 가운데 1대 꼴로 한국 자동차였다. 한국 자동차는 진출 2년 만에 도요다 아성을 무너뜨렸다. 특정한 국가에서 한국 제품이 이렇게 폭넓은 사랑을 받는 경우가 있을까 싶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란과 갈등한다면 현명치 못하다.

미국이 주도하는 이란 제재 때마다 한국과 이란 관계는 출렁인다. 지난해 트럼프 정부는 국제사회와 함께한 이란 핵합의(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이란 제재에 동참해 석유 판매 대금 지불을 미루고 있다. 여기에 윤 대통령 발언까지 논란이 되면서 이란 정부와 국민을 자극했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이란 입장이라면 어떠할지 헤아려 봐야한다. 지금처럼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라며 대충 뭉개서는 안 된다. 말은 듣는 사람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충분치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진솔하게 사과하고 관계 개선에 나서야 한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며 실리를 챙겼다. 외교 전문가들은 미국의 적은 우리에게도 적이라는 잠재의식 속에서 “이란은 적”이라는 발언이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이란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수정하고 유연한 스탠스를 갖춰야 한다. 지금처럼 ‘형님이 시키는 일’이라며 맹목적으로 편들다 보면 오랜 친구를 잃는다. 40조원 투자 유치라는 모처럼 외교성과가 말실수로 묻혀서야 되겠는가.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