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7월 2200억 규모 5건 SLB 발행...친환경차 할부금융 비중 제고 조건
/현대캐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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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경제=박종훈 기자] 현대캐피탈이 지난 7월 국내 최초로 원화 지속가능연계채권(SLB)을 발행했다. SLB는 기존의 ESG채권과 달리 발행까지 높은 문턱을 낮추면서도, ESG 관련 목표를 지향하며 기업의 자금조달에도 숨통을 틔게 하는 대안이 될 것으로 예상돼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SLB는 녹색채권·사회적채권·지속가능채권 등의 전통적 ESG채권 발행이 어려운 기업들의 시장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개발됐다. 특히 관건은 녹색채권이다.

기존의 ESG채권은 조달자금의 사용을 적격 프로젝트로 국한했다. 즉, 녹색채권의 경우 친환경 적격 프로젝트에 사용처가 없거나, 비환경적 산업에 종사하는 기업의 경우 발행을 고려하기 매우 까다롭다. 이는 그린워싱 등을 방지하기 위해 강구된 장치지만, 한편으로 시장 참여를 제한하는 부작용도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SLB는 조달자금의 사용 범위를 특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비환경적 기업의 발행도 제한이 없다. 다만 특정한 환경·사회적 목표 달성을 약속해야 하며 이와 관련한 세부 조건이 SLB 발행에 포함돼야 한다.

즉, SLB 발행사는 핵심성과지표(KPI)를 정하고 이에 기반해 지속가능성과목표(SPT)를 지정해야 한다. 이 SPT를 언제까지 달성할지에 대한 목표일과 SPT 달성 여부에 따른 재무적 인센티브를 발행설명서에 명시해야 한다.

지난 2019년부터 2022년 사이 전 세계 시장에서 발행된 SLB는 95% 이상이 환경 개선에 목표를 두고 있다.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KPI는 탄소배출량이다. SPT는 발행 기업의 탄소배출량을 특정 연도 대비 채권 만기 이전에 어느 정도까지 감축하겠다고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채권 투자자에게는 다양한 인센티브가 주어질 수 있다. SPT를 달성하냐 미달성하냐에 따라 이자율을 할증·할인한다든지, 만기에 상환할증금을 일정 수준 지급할 수도 있다. 혹은 채권을 조기상환한다든가, 특정 단체나 기관 등에 약정된 수준의 기부를 진행한다든지, 탄소배출권을 발행사가 매입한다든지 조건을 달 수도 있다.

가령 현대캐피탈의 경우, 만기가 1.6년에서 5년의 2200억원 규모 5건의 SLB를 발행했다. 현대캐피탈의 KPI는 전체 자동차 할부금융 취급 건수에서 친환경차의 비중이다. SPT는 자동차 대수 기준 2023년부터 2027년 사이 매년 친환경차 할부금융 비중을 기존에 비해 1%p 확대하는 것이다. 즉 2022년 기준 친환경차 할부금융 비중이 12% 수준인데, 2027년까지 17%로 늘리겠다는 목표다. SPT 달성 목표일은 매년 12월 31일이다.

17%까지 친환경차 비중이 높아졌다고 볼 때, 전체 할부금융 자동차 대수 35만 4521대 중 5만 8500대 가량을 친환경차 할부금융 비중으로 보겠다는 의미다.

현대캐피탈이 사용하는 인센티브는 상환할증 프리미엄이다. SLB 상환기일 직전 사업연도 말에 SPT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채권 발행금액의 0.02%를 채권만기에 곱해 산정된 프리미엄을 상환기일에 최종 채권자의 보유 비율에 따라 현금으로 일시지급하도록 돼 있다.

SLB의 발행이 녹색채권 등 기존 ESG채권 발행보다 훨씬 유용하다는 점은 현대캐피탈 사례서 잘 드러난다.

자본시장연구원 최순영 선임연구위원은 “현대캐피탈은 SPT 달성을 위해 현대자동차그룹과 적극적 협력, 친환경차 할부 상품 판매 확대, 전기차 조직 신설, 배터리 리스 상품 개발, 배터리 제조업체 및 전기차 충전소 관련 금융상품 개발 등 다양한 방안들을 활용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며 “이러한 다양한 활동들은 하나의 적격 프로젝트로 통합하거나, 개별적 활동에 투입된 자금별 영향평가를 하기 어렵기 때문에 녹색채권 발행에는 용이하지 않다”라고 설명한다.

그에 반해 SLB를 통해서는 자금활용의 용도와 상관없이 최종적으로는 SPT 달성 여부만 보기 때문에, 다양한 ESG 전략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캐피탈의 사례는 SLB 설계의 복잡성도 보여준다. 우선 충분한 자금조달 비용절감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시장의 녹색 프리미엄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그 수준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특히 국내 시장에서 녹색 프리미엄은 충분치 않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또한 SPT 수준을 평가해 설정하는 데 어려움도 있다. SLB의 기준을 마련하고 있는 국제자본시장연맹(ICMA)은 “SPT는 일상적 사업활동 이상의 노력이 필요한 ‘야심적’ 수준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가 야심적인 건지는 모른다. 현대캐피탈이 제시한 연간 1%의 친환경차 할부금융 비중 확대는 적어도 국내 친환경차 판매 증가세를 상회하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의미일까.

앞서 언급된 녹색 프리미엄과 관련해서 인센티브의 설정이나 평가도 어렵다. 예를 들어 현대캐피탈이 상환할증 프리미엄을 너무 낮게 잡는다면 결국 투자 수요가 감소하는 것이고, 녹색 프리미엄 역시 감소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센티브를 무작정 높이자니, 기업의 입장에선 SLB 발행 유인이 줄어든다.

SLB는 한국거래소가 지난 2022년 도입했다. 그러나 1년여 동안 발행 실적이 없다. 국내에선 SK하이닉스가 지난 1월 해외 시장에서 10억달러 규모의 SLB를 발행한 게 국내 기업으로는 최초며, 6개월이 지나 이번 현대캐피탈의 발행이 원화 SLB 발행의 첫 사례다. 첫 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나, 본격적으로 SLB 시장이 형성되는 데에는 그만큼 과제도 산적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 ESG채권의 경우, 조달자금의 사용에는 불편한 점이 있지만 이미 적격 프로젝트에 대한 기준을 비롯해 상당한 발행 사례가 축적돼 있다. 다시 말해 시장의 벤치마크가 형성돼 있다는 의미다.

그에 반해 SLB는 KPI와 SPT 설정과 평가를 위한 데이터·벤치마크·평가방법론 등이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축적될 필요가 있다. 향후 시장 선순환 구조가 이뤄지면 점차 해소될 과제이다.

박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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