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대립과 혐오정치를 끝내자.” 새해 벽두부터 선거구제 개편 논의가 활발하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불을 지피고 윤석열 대통령이 화답하면서 속도를 내는 모양새다. 30일 여야 정치인 121명이 참여하는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 모임’이 출범 했다. 이들은 “현행 소선거구제는 절반 가까이를 사표(死票)로 만든다. 이 때문에 정당 득표율과 의석수가 괴리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선거구제 개편을 중심으로 한 정치개혁에 뜻을 모으기로 했다. 갈등은 줄이고 비례성은 높임으로써 민의를 최대한 반영하자는 취지다.

한국정치에서 가장 큰 해악으로 승자독식과 극단적인 대결정치를 꼽는다.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소선거구제가 낳은 산물이다. 소선거구제 아래서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영남과 호남에서 독점적 지배를 누려왔다. 여야를 떠나 정치권이 이제라도 정치개혁 논의에 착수한 건 다행이다. 그동안 의미 있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노무현은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낙선이 예상되는 부산을 자처했고, 정세균 또한 안방을 뒤로한 채 험지나 다름없던 서울 종로로 발길을 돌렸다. ‘바보 노무현’은 한국정치에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김부겸 전 총리와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 국민의힘 정운천 의원 역시 의미 있는 정치실험으로 주목받는다. 김 전 총리는 경기 군포에서 재선을 끝내고 민주당 불모지 대구로 갔다. 그는 2012년 이후 대구에서 광역단체장을 포함해 4차례 선거에 출마했지만 20대 총선 당선을 제외하면 모두 패했다. 그렇지만 철옹성 같은 지역장벽을 깬 의미 있는 낙선이었다. 많은 이들은 김부겸 식 정치에 박수를 보냈다. 정운천 의원 또한 보수정당 무덤인 호남에서 한나라당과 새누리당, 국민의힘 옷을 입고 의미 있는 결실을 거뒀다.

정 의원은 스스로를 돈키호테에 비유한다.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 초대 농림식품부장관을 마치고 낙선이 빤한 호남(전주 을)에 출사표를 던졌다. 첫 출마는 2010년 전북도지사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였다. 이어 2012년 19대 총선과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정 의원은 정치를 시작하면서 지역주의 극복을 내걸었다. 그는 7년만인 20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상대로 111표 차이로 이겼다. 신승이었지만 보수정당 무덤에서 일군 값진 당선이었다. 지난한 노력은 지지율 변화에서 확인된다. 2010년 도지사 선거(낙선) 18%, 2012년 19대 총선(낙선) 35.8%, 2016년 20대 총선(당선) 37.5%까지 올랐다.

정 의원은 올해 또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그는 비례의원직 사퇴와 함께 전주을 재선거(4월 5일) 출마를 선언했다. 현직 의원이 비례의원을 포기하고 지역구 재선거에 출마한 건 헌정사상 처음이다. 정 의원은 “동서화합과 지역 타파, 여야 협치를 위해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며 출마 배경을 설명했다. 전주 을은 이상직 민주당 전 의원이 징역형을 받으면서 재선거를 치른다. 민주당은 무공천을 결정했지만 민주당 텃밭에서 보수정당은 여전히 열세다. 그동안 정 의원은 꾸준히 서진정책을 펼쳐왔다. 국민의힘 국회의원 55명을 호남지역 45개 기초단체와 연결하고 현안을 지원한 ‘동행 의원’은 큰 호응을 얻었다.

지난해 “의미 있는 변화”를 내걸고 강남 서초로 지역구를 옮긴 민주당 홍익표 의원의 도전도 눈길을 끈다. 홍 의원은 서울 중구‧성동구 갑에서 내리 3선에 당선됐다. 민주당 강세 지역을 떠나 강남 서초 을을 택한 건 ‘바보 노무현’에 버금가는 무모한 선택이다. 서초 을은 1988년 13대 총선 이후 민주당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지난해 10월 지역구사무실을 연 홍 의원은 “대선과 지방선거로 당이 어려운 상황에서 책임감을 느꼈다. 강남은 평균 이상 학력과 자산을 갖춘 여론주도층이 몰려 있다. 이곳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민주당은 어려울 것”이라며 “왜 민주당이 선택받지 못하는지 현장에서 답을 찾겠다”며 결의를 다졌다.

홍 의원은 민주당내 몇 안 되는 합리적이며 균형감을 지닌 정치인으로 꼽힌다. 그는 “누가 시켜서 하는 ‘변화나 혁신’이 아닌, 내가 먼저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결정했다. 서초 을 주민들과 대한민국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함께 고민하고, 정치를 바꿔나가겠다”며 정치적 균형감을 드러냈다. 홍 의원의 이런 결정에 보수성향이 강한 지역여론도 호응하고 있다. 지역구를 험지로 옮겼던 정세균 전 국회의장도 힘을 실어줬다. 정 전 의장은 개소식 환영사에서 “민주당 간판 홍익표 의원이 험지 서초에서 새로운 걸음을 내 딛는다. 새로운 도전을 선택한 홍익표 의원의 용기를 칭찬하며 꼭 꿈을 이루길 바란다”고 격려했다.

정운천과 홍익표 의원이 내딛은 행보는 우리정치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이들의 도전은 극단적인 대결정치를 끝내는 정치개혁 논의에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의미 있는 변화가 축적될 때 대립과 증오정치는 완화된다. 돈키호테를 외롭게 하지 말자.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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