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한국전력 회사채 발행 한도를 최대 6배까지 늘리는 ‘한국전력공사법 개정안’이 지난 8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부결 배경은 민주당 반대와 무관심 때문이었다. 여야는 애초 한전 채무 불이행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데 공감했었다. 비난 여론이 쏟아지자 여야는 15일 다시 상임위를 열어 합의했고 12월 중 처리하기로 했다. 이날 본회의에는 재적 의원 299명 중 무려 3분의 1에 해당하는 97명이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새해 예산안 처리도 답보상태에 있다. 여야는 법인세 인하를 둘러싸고 법정 처리 시한(12월 2일)을 넘긴데 이어 김진표 의장이 중재한 15일도 지키지 못했다. 급기야 김 의장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최소한 양심도 없다”며 호통과 함께 19일 처리를 못 박았다. 예산안이 법정 처리 시한을 넘긴 건 2014년 국회 선진화법 도입 이후 처음이다. 이런 상황에도 일부 의원들은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소속 위원 17명 중 8명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 건의안이 통과된 11일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17일까지 아일랜드와 프랑스, 독일을 다녀왔다. 출장 필요성을 고려해도 시기적으로 부적절했다는 비판 여론은 비등했다. 이들은 “외유성 출장은 아니며 오래전 계획한 일정이라 갑자기 취소하면 ‘외교 결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정기국회(12월 9일) 이후로 계획했으나 여야 대치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예산안을 놔둔 채 떠난 해외 출장은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선진 정치제도를 들여다보기 위한 해외 출장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선후가 바뀌었다. 프로그램만 보면 의미 있다. 비례 위성 정당 문제로 몸살을 앓았기에 아일랜드 다당제와 독일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들여다보는 건 필요하다. 또 19일 이전 귀국함으로써 예산안 처리는 참여할 수 있다.

핵심은 영화 곡성 대사처럼 “뭣이 중한지”다. 국가 예산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민생 현안일뿐더러 예산심의는 국회 고유 권한이다. 허나 여야 대립으로 사상 초유의 준예산 사태마저 우려되는 상황이다. 해외 출장은 빛바랠 수밖에 없다. 김진표 국회의장도 16일부터 해외 출장을 계획했으나 예산안 처리가 터덕대자 취소했다. 국회의장 또한 해외 순방 필요성을 간과해서 취소한 건 아니다. 순위를 고려한 판단이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비슷한 상황에서 해외 순방을 취소함으로써 무엇이 중요한지 보여줬다. 정 전 의장은 2019년 5월 캐나다와 멕시코 순방 계획을 전격 취소했다. 당시 민주당과 한국당은 드루킹 댓글 조작 특검과 추경 예산안, 국회의원 사직서 처리를 놓고 대치 국면을 이어갔다. 정 의장은 국회 정상화를 위해 외교적 결례를 무릅썼다. 당시 캐나다 상·하원 의장과 멕시코 엔리케 대통령 면담이 계획돼 있었다.

국회의원 해외 출장은 이따금 여론 도마 위에 오른다. 국민들이 해외 출장을 부정적으로 보는 건 국회가 책무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지 않다는 비판에 근거한다. 개인적으로 해외 출장에 대해 긍정적이다. 국회의원들이 다양한 경험과 폭넓은 안목을 갖추면 국민에게도 이익이다. 관건은 국민 눈높이에 부응하지 못하는 외유성 출장에 있다.

한때 관행화됐던 피감기관 예산으로 떠났던 해외 출장도 같은 맥락에서 비난받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은 국회의원 재직 당시 피감기관 예산으로 다녀온 해외 출장이 빌미가 돼 사퇴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정치자금 수수에 해당한다고 해석했다. 한국국제협력재단(KOIKA)은 국회의원 해외 출장 창구였다. 청탁금지법이 시행된 2017년 이후 2018년까지 KOICA 예산으로 다녀온 해외 출장만 7차례 2억3,000만 원에 달했다. 지위를 이용한 전형적인 피감기관 목을 조르기였다. 그해 국회는 126회 해외 출장에 예산 57억 원을 썼다.

관행은 21대 국회에도 계속됐다. 2019년 상반기 국회 본회의는 세 번 열리는 데 그쳤고 넉 달은 겉돌았다. 그런데도 절반 넘는 155명은 국회 예산과 외부 지원으로 해외를 다녀왔다. 농해수위와 예결특위 출장 보고서는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또 올해 6~7월 해외 출장을 다녀온 의원들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배가량 급증했다. 코로나19 완화를 이유로 들 수 있지만 올해 상반기 50여 일 동안 개점휴업 상태를 고려하면 염치없는 출장이다.

지금 여의도 정치는 최악이다. 국민이 국회를 걱정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올해 처음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또 세계적인 기관마다 내년은 올해보다 더 어렵다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어느 때보다 국회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정파 싸움에만 매몰돼 으르렁대고 있다. 국민 눈에는 거대한 해일이 몰려오는데 한가롭게 조개껍데기를 놓고 다투는 형국이다.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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