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한양대학교 갈등문제연구소 수석 연구위원(전 국회 부대변인)
임병식 한양대학교 갈등문제연구소 수석 연구위원(전 국회 부대변인)

영화 '오만과 편견'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사랑에 눈먼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다. 대중과 정치 관계도 다르지 않다. 밀고 당기는 힘은 ‘오만과 편견’ 대신 '오만과 겸손'으로 살짝 비틀면 된다. 대중은 평소에는 침묵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대중을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한다. 대신 목소리 큰 극성 지지층에 기댄다. 확성기에 도취된 나머지 민심을 오판하고, 여론조사 결과를 입맛대로 해석한다. 막상 투표함을 열면 종종 다른 결과가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대중은 오만하면 심판하지만, 겸손하면 손 내민다. 선거로 민의를 집약하는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공통 현상이다. 최근 크고 작은 선거에서 반복되는 투표 결과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명박 정부 2년차 때 치러진 18대 총선을 보자. 선거는 중간 평가 성격이 강했다. 여론은 야당에 유리했고, 민주당은 압승을 기대했다. 당시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 재개를 앞두고 반정부 여론이 강했다. 또 한나라당은 계파 싸움으로 사분오열됐고 돈 선거, 성희롱, 지역감정 조장 등 악재가 끊이지 않았다. 야당은 오만한 반면 여당은 긴장했다. 공천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현역의원 39%를 교체했다. 역대 최고였다. 민주당은 19%에 머물렀다.

민주당은 오만한 나머지 혁신 경쟁에서 머뭇거렸다. 투표함을 열자 여대야소였다. 민주당은 서울지역 48개 선거구에서 7석을 얻는데 그쳤다. 한나라당은 서울 40석을 포함해 총 152석으로 민주당 81석을 저만치 앞질렀다. 민주당으로서는 사상 최악 참패였다. 민심은 무능한 여당(한나라당)보다 오만한 야당(민주당)을 심판한 것이다. 오만한 여당에 회초리를 든 선거는 또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 치른 서울과 부산시장 보궐선거다. 당시 모든 여론조사 결과는 민주당 우세였다. 대통령 지지도는 물론이고 정당 지지율에서도 민주당은 국민의힘을 앞질렀다. 민주당은 여론을 오독하고 또 오만했다.

자신들 귀책사유로 치러진 보궐선거임에도 후보를 낸 건 가장 큰 실책이었다. 서울 박원순, 부산 오거돈 시장이 성추문에 휩싸이면서 발생한 선거였다. 또 당헌당규대로라면 후보를 내면 안 됐다. 하지만 전 당원 투표라는 꼼수를 빌어 우회했다. 야당을 적으로 간주하고, 입법 독주를 강행하는 민주당을 바라보는 싸늘한 민심 또한 한계치에 달했다. 결과는 주지하다시피 국민의힘 오세훈, 김형준 후보 압승으로 끝났다. 투표 내용을 분석하면 형편없는 참패였다. 서울(25개)과 부산(16개) 41개 자치구 가운데 민주당은 한 곳도 이기지 못했다. 민주당은 이후로도 대선을 포함해 3연패했다.

민심은 오만한 윤석열 정권도 심판했다. 2023년 10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은 두 자리 수(17.15%p)로 패했다. 보궐선거는 국민의힘 소속 김태우 전 청장이 대법원 유죄 확정 판결을 받으면서 발생했다. 후보를 내면 안 됐지만 무리수를 두었다. 윤 대통령은 그해 8월 김 전 구청장을 특별 사면했다. 유죄 확정 판결 3개월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사면권을 남용했다는 비판은 거셌다. 집권여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국민의힘은 한발 나아가 김 전 구청장 후보로 확정했다. 오로지 대통령 뜻을 받든 오만한 결정에 민심은 철퇴를 들었다. 

4.10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이 내홍에 휩싸였다. 시스템 공천 실종과 이재명 대표 사당 논란이 진원지다. 그동안 이 대표 측근 몇몇이 비선에서 공천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의혹은 파다했다. 친명계는 음모론으로 일축했는데 현실로 드러났다. 비명계만 골라내 솎아내는 공천이 노골화한 것이다. 하위 20% 평가 결과가 비명계에 집중됐다. 여기에 비명계 현역 의원을 배제한 정체불명 여론조사까지 횡행하면서 갈등은 폭발했다. 임혁백 공관위원장은 "평가위원회로부터 의원 점수와 등수가 적힌 명단만 받았다"고 했다. 조정식 사무총장은 정체불명 여론조사 대부분을 당에서 했다고 인정했다. 공관위 기능이 무력화됐다는 뜻이다.

이재명 사당을 만들기 위한 무리수가 거듭되자 민심도 돌아섰다. 최근 모든 여론조사에서 경고등이 켜졌다. 급기야 당 원로인 정세균 김부겸 전 총리까지 나섰다. 이쯤 되면 이 대표는 불출마 선언을 포함해 뭐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는 "이런 식이면 365일 사퇴해야 한다"며 일축했다. 이 대표와 측근들이 보이는 오만함은 임계점을 넘어섰다. 과거 사례에 비춰볼 때 민심은 무능한 여당보다 오만한 야당을 심판할 가능성이 높다. 오만과 겸손은 선거 승패를 가르는 잣대다. 이 대표를 비롯해 공천 파동에 연루된 지도부 인사들 전원 사퇴가 그나마 대안이다.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대중은 우둔하지 않다.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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