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근로기준법 아닌 판례 근거한 ‘포괄임금제’…“오‧남용 단속해야”
IT 업계 근로자, ‘크런치 모드’ 호소…초과근무에도 추가수당 없어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16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미래노동시장연구회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16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미래노동시장연구회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스경제=박수연 기자] 게임 등 IT 업계에서 마감을 앞두고 수면, 영양 섭취, 위생, 기타 사회활동 등을 희생하며 장시간 업무를 지속하는 것을 ‘크런치 모드’라고 한다.

게임 및 IT 업계에서 근로자들의 ‘크런치 모드’는 이미 흔한 얘기다. 게임회사를 다니는 A씨는 회사에서 ‘포괄임금제’를 근거로 한 달 40시간은 무조건 야근을 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A씨는 주말과 휴일까지 나와 40시간 넘게 일했지만 추가수당은 없었다.

고용노동부는 이런 문제를 회사의 ‘포괄임금제’ 오남용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노동부는 내년 1월부터 3월까지 IT업계를 대상으로 포괄임금제 오남용 의심사업장 10~20개를 기획‧감독하겠다고 밝혔다.

소위 ‘포괄임금제’라 불리는 제도는 △근로시간 산정이 어렵거나 △당사자 간의 합의가 있거나 △근로자에게 불이익하지 않은 경우에 실제 근로시간을 따지지 않고 노사가 합의한 일정액을 매월 지급하는 제도다.

포괄임금제는 각각 산정해야 할 복수의 임금항목을 포괄해 일정액을 지급하는 ‘포괄임금 계약’과 기본임금 외 법정수다의 모두‧일부를 수당별 정액으로 지급하는 ‘고정 OT(연장근로) 계약’이 있다.

◇ 근로시간 산정 가능해도 ‘포괄임금제’ 당연시

다만 포괄임금제와 고정OT는 원칙적으로 법에 근거한 제도가 아니다. 하지만 법원은 판례를 근거로 ‘근로시간 산정이 어려운 경우’ 등을 예외적으로 인정해왔다.

이 때문에 게임, IT 업계 노동자들은 초과근무를 당연히 여기고 주 52시간 상한선이 지켜지지 않는 사례도 빈번했다. 즉 근로시간만큼 임금을 받지 못하는 ‘공짜야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20년 노동부가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포괄임금제 적용사업체는 조사 대상인 2522곳 중 749곳(29.7%)에 달했다. 사업장 규모별로 상시 근로자 수 100인 이상 300인 미만 사업장의 30.3%가 포괄임금제를 적용했고 10인 이상 100인 미만(29.8%) 사업장도 평균을 웃돌았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소위 포괄임금제는 현장에서 근로시간 계산 편의와 예측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포괄임금‧고정OT로 인한 문제는 ‘계약 그 자체’라기 보다는 이를 오남용해 ‘일한 만큼 보상하지 않는 공짜야근’”이라고 규정했다.

이 장관은 이런 문제가 특히 사회 초년생인 청년이나 노동 약자에게 더욱 가혹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 노동계 “법정수당 도둑질하는 포괄임금제”

다만 노동계는 포괄임금제 자체를 폐지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는 보도자료를 내고 “노동부는 근로시간 산정이 어렵지 않은 경우조차 포괄임금제가 적법하다고 인정해왔다”며 “포괄임금제는 법정수당을 도둑질하고 휴식권을 빼앗고, 근로기준법을 무너뜨리는 범죄행위”라고 규정했다.

노동계의 요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7월 국회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 대응 토론회’에서 오세윤 전국화선식품노조 IT 위원장(네이버 지회장)은 “IT업계에서 관련 서비스 및 게임이 성공하기 쉽지 않아 장시간 노동이 많이 발생하는데 결국 리스크는 오롯이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으로 해결한다”며 “이를 허용한 가장 나쁜 제도가 포괄임금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오 지회장은 “과거처럼 노동의 양을 늘리는 게 아닌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노동이 공짜라서 너무나 손쉽게 장시간 노동을 선택하게 하는 포괄임금제를 우선 폐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하지만 업계는 업무적인 특성 상 실제 근로시간을 산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근거로 포괄임금제 일괄 폐지는 쉽지 않다고 호소한다. 이에 전문가들은 고용노동부의 ‘포괄임금제 오‧남용 감독’이 투명하게 이뤄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부에서 근로감독을 강화하겠다고 하더라도 근로자들이 현장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다”며 “노동부는 포괄임금제 감독 강화를 통해 현장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한 후 가이드라인이나 관련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부가 포괄임금제 오남용 단속에 대한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라며 “이러한 과정이 일률적으로 이뤄져야 노동계도 신뢰 하에 포괄임금제를 수긍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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