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새해 벽두부터 남북관계가 심상치 않다. 치킨게임이라도 하듯 남북 모두 긴장을 끌어올리는데 한 치 양보도 없다. 전쟁위기에 둔감한 이들조차 이러다 무슨 일 나는 것 아니냐며 우려할 정도다.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에는 남북관계를 표현하는 상징적 대사가 나온다. 중립국 감시위원회 연합국 사령관은 "한반도는 마치 겨울 숲(Winter Forest)과 같다. 작은 불씨 하나로도 큰 화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한반도 상황을 묘사하는데 이보다 적확한 표현이 있을까 싶다. 한반도는 작은 성냥불 하나로도 온 산을 태워버릴 바싹 마른 겨울 산과 같다. 언제든 폭발 개연성 높은 화약고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5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오늘 80년 간 북남 관계사에 종지부를 찍고, 조선반도(한반도)에 병존하는 두 개 국가를 인정한 기초 위에서 공화국의 대남 정책을 새롭게 법화(法化)했다"고 밝혔다. '법화'는 남북관계 틀을 바꾸는 헌법 개정을 의미한다. 김 위원장이 지시한 개헌 내용은 두 가지다.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우리 헌법 3조를 언급하며 북한도 이 같은 내용을 헌법에 담을 것과, 한반도 전쟁 시 대한민국 완정(完整) 후 공화국에 편입하라는 것이다. 통일, 화해, 동족 개념도 삭제를 지시했는데 지금까지 남북관계 뼈대를 흔드는 발언이다.

이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 당국은 남북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며 "북한 정권 스스로 반민족이고 반역사적 집단이라는 사실을 자인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북한이 도발해 온다면 몇 배로 응징할 것이며 '전쟁이냐 평화냐'를 협박하는 위장평화 전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것은 북한 정권이지 북한 주민은 아니다. 이들은 같은 민족이고 따뜻하게 포용해야 한다"며 통일부에 '북한이탈주민의 날' 제정을 지시했지만 긴장을 누그러뜨리기엔 역부족이다. '주적', '남북교류 전면 중단'을 거론할 만큼 남북관계는 최악이다.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은 불문가지다. 자본주의를 채택한 남한은 개방경제다. 수출을 주력으로 하는데다 외국 자본 투자는 우리경제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만일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전쟁으로 이어진다면 외국 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갈 게 분명하다. 불안한 나라에 산업기지를 두고 투자할 자본은 없다. '강 대 강' 대치 국면은 공멸로 가는 길이다. 일각에서는 체제유지에 목을 맨 김정은은 도박을 벌일 수 없다며 전쟁 불가론을 낙관한다. 나아가 한미일 전력으로 북한 체제를 절멸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한다. 허나 전쟁에서 승리한들 자본주의 대한민국에 무슨 실익이 있을까 싶다.

최고 안보는 평화라는 말이 있다. 근육질을 자랑하기 위해 불필요한 긴장을 유발한다면 무모하며, 국민들 목숨을 담보로 한 도박이다. 만일 북한이 도발해 올 경우 인구가 밀집한 수도권은 큰 혼란에 처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전면전 이전에 경제는 셧 다운을 각오해야 한다. 물론 평화를 구걸할 필요는 없다. 필요하다면 최악의 상황도 배제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이 또한 국민 공감대 형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한데 대북정책은 일부러 도발을 유도하지 않나 싶을 만큼 현 상황은 아슬아슬하다. 그런 면에서 9.19합의 파기는 신중하지 못했다는 판단이다.

북한 전문가 로버트 칼린 연구원과 지그프리드 해커 교수는 "한반도 상황은 1950년 6월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고 평가했다. 김 국무위원장은 그간 북한이 추구해온 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 등 연방제 통일 방안은 물론, 남북기본합의서(1991년)도 부정하고 있다. 심지어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낮은 단계 연방제를 담은 '6·15 공동선언'마저 거역하고 있다. 내부 단속을 위한 과시용 발언이라고 폄하할 일만은 아니다. 진영을 떠나 한반도 평화와 안정 유지는 어느 정권에나 절대적 과제다. 문재인 정부 성과를 ‘위장된 평화’라고 속단한다면 기회비용 손실이다.

대만 총통 선거에서 민주진보당 라이칭더(賴淸德)가 당선돼 양안 갈등은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 미·중 관계는 물론 동북아 안보 지형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남북관계 또한 동북아 안보 상황과 맞물려 예측은 간단치 않다. 어느 때보다 신중한 대북정책이 필요하다. 북한 도발을 자극하는 극단적 언어를 자제하는 건 기본이다. 국민 생명이 걸린 대북정책은 고도의 전략을 병행해야 한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북한이 도발할 경우 '즉시, 강력하게, 끝까지' 보복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에 대한 단호한 메시지 발신하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려는 유화적 메시지도 필요하다. 쌓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쉬운 게 세상 이치다.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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